사진으로 보는 숭례문
숭례문은 태조 7년인 1398년 완성됐다. 왕들은 숭례문을 귀히 여겼다.
외교문서인 조서(詔書)와 칙서(勅書)가 들어오는 왕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이다.
예종(1469년)은 가뭄이 들면 숭례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흉년이 찾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평안 병사 이괄의 난(1624년)이 일어나자, 공주로 피란을 떠났다.
숭례문이 잠겨있자 돌로 자물쇠를 내리쳐 열었다. 인조는 한강 위 배에서 궁이 불타오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던 정조(1791년)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수원을 갈 때마다 숭례문을 지나갔다.
정조가 숭례문을 지날 때 눈과 비가 뒤섞여 내렸고, 병사들의 옷이 젖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정조가 비를 피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다.
고종은 1907년 3월 30일 숭례문 오른쪽 성곽 일부를 허물어 길을 내도록 허락했다.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가 서울을 방문할 때였다.
“일본 황태자가 숭례문 밑을 통과하면 대한제국을 높이는 꼴이 된다”는 친일파의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숭례문은 ‘역사의 목격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1960년 4ㆍ19 혁명과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등을 지켜봤다.
1988년 올림픽과 2002년 한ㆍ일 월드컵,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촛불시위 때도 우리와 함께했다.
조선 시대 숭례문 일대엔 저잣거리가 있었다. 일종의 나라가 관리하는 시장이다.
왕들은 가뭄이 오래 지속되면 시장 문을 닫고, 숭례문 문도 걸어 잠갔다.
이 시장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1897년 최초의 근대 상설시장으로 잡았다. 사진은 1945년 해방 직후 시장 풍경이다.
천막을 덮어 만든 가게 사이로 한복 차림 여성들이 오가고 있다.
오늘날 남대문 시장은 하루 평균 30만 명이 찾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시장이 됐다.
일제 강점기 시절 숭례문 오른쪽 성곽이 뜯겨나갔다. 1906년 일본 황태자 방한 때문이었다.
‘조선신궁 참도’ 석등도 세워졌다. 황태자의 남산 신사 참배를 안내하기 위한 용도였다. 숭례문의 치욕은 광복과 함께 끝났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 플래카드가 숭례문에 걸렸다.
숭례문은 한국전쟁(1950~1953년) 때도 살아남았다. 포탄에 일부가 훼손되긴 했지만, 원형은 손상되지 않았다.
1950년 7월 인민군 탱크가 숭례문을 지났다. 1953년 1월 숭례문에는 서울에 도착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환영 문구가 내걸리기도 했다.
1958년 항공 촬영한 사진 속 숭례문에는 전차 역이 자그맣게 보인다.
현재 모습과 유사한 서울역 일대의 모습과 한강까지의 모습이 찍힌 흔치 않은 사진이다.
1960년 숭례문 일대의 모습이다.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맞서 4·19혁명이 일어난 해다.
당시 학생 시위대는 숭례문 일대를 가득 메웠다. 사진 속 전차선로는 1902년 일제 강점기 때 설치된 것이다.
오른쪽 위로 남대문 시장 모습도 보인다.
1961년 8월 15일. 숭례문 상공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광복 14주년을 기념한 행사였다. 불꽃놀이가 이뤄진 이때는 혼돈기였다.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났고, 군사 독재가 시작됐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의 행렬은 시청에서 숭례문까지 이어졌다.
1963년 숭례문 중수 준공식이 열렸다. 한국 전쟁으로 일부 훼손됐던 부분을 보수해 새 단장했다. 숭례문에 내건 태극기가 눈에 띈다.
숭례문 중수 준공식을 보기 위해 비가 오는데도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 모습도 보인다.
전쟁으로 훼손됐던 부분을 보수한 숭례문의 야경. 1963년 사진이다. 멀리 서울역이 보인다.
숭례문을 지나가는 전차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숭례문을 시작으로 석굴암과 불국사 등의 중수 사업이 이어졌다.
1965년 찍은 숭례문 수문장의 모습이다. 조선 시대 숭례문 수문장은 무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이 1504년 수문장을 국문한 기록이 남아있다.
한밤중에도 숭례문을 지켜야 하는 수문장이 자리를 떴다. 발각됐기 때문이다.
광해군일기(1611년)에는 숭례문 낙서 사건도 전해진다. 당시 병조는 숭례문 좌우의 돌에 검은색과 붉은색 글씨 낙서가 발견됐다며, 광해군에게 숭례문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지 못한 수문장의 엄중 문책을 고했다.
1979년 숭례문의 모습. 멀리 서울시 청사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보기 힘든 버스와 차들이 바쁘게 숭례문 주위를 오가고 있다.
옛날 전차선로와 전차 역은 자취를 감췄다. 1960년대에는 없었던 고층 빌딩도 눈에 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숭례문.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저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다.
17년에 이르는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며,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다. 개발 경제의 영향으로 서울은 마천루의 도시로 변했다.
1985년 새해를 맞아 숭례문 대청소 사진이다. 청소하는 사람들 사이로 숭례문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1985년 숭례문은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을 통해 해외에 소개된다.
‘양면의 문 1985년’이라는 미디어 아트로 TV 84대를 개선문 모양으로 쌓아 올린 작품이다.
전면에는 개선문 영상이, 뒷면에는 숭례문과 동대문, 한복을 입은 여인들의 30분짜리 영상이 등장한다.
당시 프랑스 퐁피두센터 현대미술관이 이 작을 사들여 화제가 됐다.
1987년 6월 숭례문 일대는 최루탄과 함성으로 뒤덮였다. 최근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의 배경이 이 시대다.
‘턱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계기로 숭례문-명동-종로 일대에서 6월 항쟁이 이어졌다.
현대사의 아픈 장면을 함께 한 숭례문은 88년 서울 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일어난 촛불시위까지 우리와 함께했다.
※이 기사는 「그날 이후 10년, 우리의 보물 숭례문」스페셜 리포트와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10년 전 숭례문의 이야기를 보고 싶으시다면 클릭하세요.
서울의 정문인 숭례문이 한 줌 재로 스러져간 이야기를 생생한 사진으로 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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